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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을 채우는 글과 말

에리히 프롬, 2020, 소유냐 존재냐, 까치

현대사회에서 소유와 존재를 명확히 대비할 수 있는지? 존재할 수 있는 순간이나 실천, 경험도 자본이 전제되어야만 한다고 생각. 소유물로서 지식 기반이 있어야 나의 생산품 만들 수 있는 것 아닐까?

그래도 지식을 소유하려고 하는 태도, 사회적으로 인정받고 성취하기 위해 무엇인가를 해야 한다는 강박, 수동적 독서습관, 나와 나의 생산품의 관계 등에 대해 돌아봄.

존재의 의미를 소유와 대비시켜 서술(142). 기억, 대화, 독서, 지식, 권위

소장품 외곽의 것은 습득하지 못한다(61).

기억하고 싶은 것을 기록해놓는 것도 또다른 형태의 소외된 기억행위이다(56).

소유적 인간은 자기가 가진 것에 의존하는 반면, 존재적 인간은 자신이 존재한다는 것, 자기가 살아 있다는 것, 기탄없이 응답할 용기만 지니면 새로운 무엇이 탄생하라라는 사실에 자신을 맡긴다(59).

존재양식의 권위는 사회적 기능을 수행하는 능력뿐 아니라 고도로 자기실현과 자기완성을 이룩하는 인격을 바탕으로 세워진다(63).

물리적 현실에 대한 우리의 상이 참으로 실재하는 것과 일치하지 않는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참이며 자명하다고 여기는 것의 상당 부분이 주변 사회의 암시적 영향으로 야기된 미망(환상)에 불과하다. 앎은 미망을 깨뜨리는 것, 착각에서 벗어나는 것에서 비롯된다(66).

무의식적 현실을 알기 위해서는 환상(합리화)을 파괴해야한다. 연구자들은 사회적으로 인정된 기존의 사고도식을 문제로 제시한다(67).

교육제도는 학생들에게 소유물로서의 지식을 공급하고, 그 지식은 훗날 학생들이 살아가면서 확보하게 될 재산이나 사회적 특권에 상응한다(68). 학교는 인간정신이 쌓아온 최고의 업적 전달 기관이라고 주장하지만 지식의 꾸러미들을 생산하는 공장에 불과하다(68).

현대적 의미에서의 능동성은 활동과 단순한 분주함을 구별하지 않는다. 소외된 활동을 할 때 나는 나 자신을 행동의 주체로 체험하지 않고 나의 활동의 결과로 경험한다(132). 행동의 주체는 나 자신이 아니고, 내적 혹은 외적 힘이 나를 통하여 행동한다(133).

자기 의지에 역행하여 무엇인가 해야한다는 내적충동에 사로잡혀 있다. 한 가지 목표를 추구하는 데에 지극히 “능동적”일 수 있다(133). 바쁘다는 의미에서 소외된 능동성은 실제로는 수동성, 비생산성이다(134).

소외되지 않은 활동은 탄생과 생산의 과정이며, 나는 나 자신을 행동의 주체로 체험한다. 나와 나의 생산품의 관계는 그대로 유지된다. 나의 활동은 나의 힘과 능력의 표출이며, 나와 나의 활동 결과가 일치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소외되지 않은 활동을 생산적 활동(productive activity)이라고 부르기로 하자(133). 이는 예술가나 과학자의 창의성과 동의어라고 할 수 없다. 중요한 것은 활동의 산물이 아니라 활동의 질이다(134).

실천(praxis)이라는 말은 아리스토텔레스가 인간의 자유로운 활동을 일컬어 사용했던 용어이다.

스피노자(1632-1677)에 의하면 활동성, 이성, 자유, 행복, 기쁨, 자기완성은 불가분의 관계로 묶여 있으며, 수동성, 불합리성, 속박, 슬픔, 무력감 그리고 인간의 본성에 반하는 모든 성향들은 불가분의 관계로 묶여있다(139).

마르크스가 품었던 노동과 자본 간의 투쟁은 존재와 소유의 싸움이었다. 삶이 죽은 것을 지배하는가, 죽은 것이 삶을 지배하는가의 문제였다(140). 역사는 아무것도 행하지 않는다. 역사란 자신의 목적을 추구하는 인간의 활동에 다름 아니다(141).

존재의 또 다른 의미 내용은 현상과 대비시킬 때 분명해진다(142).

내가 선량해 보이지만 나의 선량함이 나의 착취적 내심을 거리는 가면에 지나지 않을 경우, 나의 외적 태도는 나를 움직이는 실재의 힘과는 첨예한 모순관계에 있게 된다(142).

존재는 실천을 통해서 증대한다(161). 존재 안에서 성장하려는 끊임없는 노력(184).